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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유] 獲麟解 고문진보 중에서 麟之為靈,昭昭也,詠於《詩》,書於《春秋》,雜出於傳記百家之書。雖婦人小子,皆知其為祥也。然麟之為物,不畜於家,不恒有於天下。其為形也不類,非若馬牛犬豕豺狼麋鹿然。然則,雖有麟,不可知其為麟也,角者,吾知其為牛;鬛者,吾知其為馬;犬豕豺狼麋鹿,吾知其為犬豕豺狼麋鹿;惟麟也不可知。不可知,則其謂之不祥也亦宜。雖然,麟之出,必有聖人在乎位,麟為聖人出也。聖人者必知麟,麟之果不為不祥也。又曰:麟之所以為麟者,以德不以形。若麟之出不待聖人,則謂之不祥也亦宜。
발해를 "북국"이라 불렀다면 동족으로 본 것인가? 발해를 "북국"이라고 불렀다 해서 이는 신라가 발해를 동족으로 본것이다. 따라서 이를 "남북국시대"로 보는 근거로 삼는 시각이 있다. 나는 남북국 시대 자체를 논쟁으로 삼을 생각은 없다. 통일신라시대를 남북국시대로 보느냐 아니냐는 다분히 이데올로기적 측면이 있어 여기에 대한 논의를 하고 싶은것은 아니고-. 다만 신라가 발해를 "북국"이라 부른것은 결국 당시 두나라가 서로 한민족의 역사를 분할해서 점유한 세력으로 보고 있었다는 근거로 삼는다는 부분에 대해서인데. 말도 안되는 주장이다. 속자치통감을 보면, 송나라가 북쪽을 점유한 거란, 금나라, 몽골을 가리킬때 항상 "북국" 그군대는"북군"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송나라가 자기 땅을 점유한 이민족을 이리 불렀다고 해서 요, 금, 몽골을 동족의 "남북조시대"라..
[고려사] 쿠빌라이가 고려태자의 입조를 받고 기뻐하는 장면 世家 > 世家 卷第二十五 > 元宗 元年 > 3월 初, 憲宗皇帝南征, 駐蹕釣魚山, 王自燕京, 赴行在, 道過京兆·潼關. 守土者, 迎至華淸宮, 請浴溫泉, 王謝曰, “此唐明皇, 所嘗御者, 雖異世, 人臣安敢褻乎?” 聞者嘆其知禮. 至六槃山, 憲宗皇帝晏駕, 而阿里孛哥阻兵朔野, 諸侯虞疑, 罔知所從. 時, 皇弟忽必烈觀兵江南, 王遂南轅間關, 至梁楚之郊, 皇弟適在襄陽, 班師北上. 王服軟角烏紗幞頭, 廣袖紫羅袍, 犀鞓象笏, 奉幣迎謁道左. 眉目如畵, 周旋可則, 群僚皆以品服, 排班于後. 皇弟驚喜曰, “高麗萬里之國, 自唐太宗親征而不能服, 今其世子, 自來歸我, 此天意也.” 大加褒獎, 與俱至開平府. 本國以高宗薨告, 乃命達魯花赤束里大等護其行歸國. 江淮宣撫使趙良弼, 言于皇弟曰, “高麗雖名小國, 依阻山海, 國家用兵二十餘年, 尙未臣附. 前歲,..
[예] 석담일기 중에서 율곡 찬: 석담일기 (대동야승) 중에서: 七月十三日大雨文定王后之喪將發引。禮曹判書尹春年議請百官乘馬隨梓宮。大臣或有主其議者。有旨曰。都門內乘馬隨大轝。非古喪禮。議乃止。十五日下玄宮。上以疾不獲隨轝。我朝禮文。若自上不會葬。則立主之時。必以三公爲獻官。代上行禮。是時左議政沈通源右議政李蓂在山陵。不復攷禮。使吏曹差參贊宋麒壽爲獻官。識者尤其變禮。二十八日卒哭。自上及百官皆着黑笠。識者恨其從吉之速。蓋我朝喪禮。雖不盡合三代之制。若比中國。則頗詳密。漢惠以來所未有也。卒哭前上下皆着衰服。卒哭後視事時。權着白衣烏紗帽黑角帶。燕居時。着白衣帶笠。凡干喪事着衰服。此祖宗朝法制也。成廟朝議者以爲。旣着烏紗帽。則笠亦當黑。于時無有據禮爭之者。遂於卒哭後着黑笠。中廟賓天。柳灌爲摠護使建議曰。衰服尙未脫而遂着黑笠。旣乖禮意。且非祖宗之制。遂定白笠之制。明宗初。柳灌等被禍。議者曰。白笠非古制。乃柳灌所..
[한자] 汨자에 대하여 汩 자는 "골"로 읽히지만 "멱"으로도 읽힌다. 현대 중국어 발음을 보면 "멱"으로 읽는것이 일반적으로 보이지만 우리나라는 汩沒이라는 단어에서 보듯이 "골몰"이라고 쓰는 경우도 많다. 인터넷을 찾아보면 "골"과 "멱"이 사실 같은 글자가 아니라는 주장이 있다. "골"은 우방이 "가로 왈"이지만 "멱"은 우방이 "날 일" 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 글자는 같은 글자를 "골"과 "멱"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서로 비슷하지만 다른 글자가 하나의 글자로 착각되어 쓰이게 되는 셈이되겠다. 【汩】ㄍㄨˇ〔汨〕ㄇ|ˋ ○ 汩沒╳ 汨沒「汩」是沉沒、消滅的意思,右旁作「曰」,形近於「汨」;「汨」音ㄇ|ˋ,右旁作「日」,是水名,和羅水合流後叫汨羅江,戰國時屈原投此江而死。「汩沒」是埋沒的意思,所以當用「汩」而非「汨」
[맹자] 逃墨必歸於楊,逃楊必歸於儒 왜 묵씨에서 도망나오면 양주로 돌아오고 양주에서 도망 나오면 유가로 돌아온다고 했을까? 孟子曰:「逃墨必歸於楊,逃楊必歸於儒。歸,斯受之而已矣。墨氏務外而不情,楊氏太簡而近實,故其反正之漸,大略如此。歸斯受之者,憫其陷溺之久,而取其悔悟之新也。今之與楊墨辯者,如追放豚,既入其苙,又從而招之。」放豚,放逸之豕豚也。苙,闌也。招,罥也,羈其足也。言彼既來歸,而又追咎其既往之失也。此章見聖賢之於異端,距之甚嚴,而於其來歸,待之甚恕。距之嚴,故人知彼說之為邪;待之恕,故人知此道之可反,仁之至,義之盡也。 이는 맹자가 묵자보다는 양주가 차라리 더 유가와 가깝다고 느껴서 일 것이다. 양주의 어떤면을 유가와 보다 가깝다고 느낀것일까? 위키 중국판의 양주학설 편에는 아래와 같이 되어 있다. 但孟子也說,「逃墨必歸於楊,逃楊必歸於儒」,簡稱「逃墨歸楊,逃楊歸儒」,所以許多..
[삼국지] 제갈량의 융중대 제갈량이 쓴 글로 유명한 것은 전출사표와 후출사표. 후출사표의 경우 제갈량이 썼다 아니다로 말이 많지만 굳이 이런 글을 남이 위조할 필요가 있을까 싶고 전출사표와 상통하는 면이 많은것 같아 필자의 천견으로는 제갈량의 저작이 맞을 것이라고 본다. 제갈량의 글 중에 잘 알려지지 않은 글에 "융중대" 혹은 "초려대"라는 것이 있다. 바로 유비가 삼고초려 후 마침내 제갈량이 유비에게 천하삼분지계를 설파하는 장면으로 삼국지 제갈량전에 포함되어 있는 문장이다. 제갈량의 글 답게 간단하면서도 의표를 찌르고 사람을 격동시키는 면이 있어 천하의 명문 중 하나로 전출사표 못지 않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하여 좋아하는 문장이다. >> 隆中對 又名〈草廬對〉 自董卓已來,豪傑並起,跨州連郡者不可勝數。曹操比於袁紹,則名微而衆寡,然操遂能克紹..
이 블로그의 당호-초야잠필에 대해서 내가 좋아하는 한문문장이 몇개 있는데 그 중 잘 알려지지 않은것 중에 연려실기술의 서문이 있다. 여기에는 연려실기술의 저자가 이 책을 쓰게 된 여유를 담담히 적어 내려갔는데 참으로 명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 서문에 초야잠필이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벼슬하지 않고 초야에 묻혀 묵묵히 자기 작업을 하는 저자의 모습이 연상되어 내가 이를 따라갈수는 없더라도 흠모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하였다. 연려실기술 서문의 "초야잠필"의 문구를 따서 이 블로그의 당호를 짓는다. 내가 열세 살 때에 선군(先君)을 모시고 자면서 꿈을 꾸었다. 꿈에 임금이 거둥하시는 것을 여러 아이들과 길가에서 바라보고 있었는데, 임금께서 갑자기 연(輦)을 머물게 하시고, 특별히 나를 불러 앞에 오라 하시더니, “시를 지을 줄 아는냐.”..